장문의 글을 썼는데
지워져서 처음 다시 쓰느라 늦어졌습니다.
미안합니다
https://www.chuing.net/zboard/zboard.php?id=comm_p&no=24844&cpage=1#commentHidden48372
기존에 있던 댓글마다 제가 댓글 달면에는 보기 불편하니까 한꺼번에
이어서 댓글 달겠습니다
순서대로 답변 해드릴게요
"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 제출한것에 대해 자꾸 질문하시는데
이것에 대해 오히려 제가 역으로 질문하고 싶네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단순히 쑈 한거라고 밖에 안봅니다
1-1
님 말대로 격분한 홍범도가 이르쿠츠크파가 자신들의 명의 도용해서 거짓말 했다면서 보고서까지 써서 러시아공화국 군사혁명위원회 참모총장과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에다가 제출하고 레닌까지 만났는데 그 후에 상황이 어떻게 되었나요 ?
잃어버린 명예가 돌아왔나요 ??
아니면 이름 도용 당한걸로 끝나서 독립군 죽였다는 누명 씌인게 풀렸나요 ??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안일어났죠 ??
레닌 만나서 단독 회담하고 금화 100루블, 군복 한 벌, 홍범도의 이름이 새겨진 모젤 권총을 받고 사진 찍고 끝났는데요 ???
본인 스스로가 누명이 씌인채로 살아가는데 계속 레닌쪽에 항의나 명예회복을 위해 아무것도 안하고,
또 레닌쪽에서는 지속적으로 문제 해줄려는 노력도 없었죠??
반평생 독립운동하다가 이름 도용 당해서 독립군 때려잡았다고 누명 씌인 분이
같은 독립군한테 암살 당할뻔하기까지 했는데 단순하게 레닌 만나서 돈이랑 군복 받고나서 같이 사진 찍고
그냥, 공산당에 가입한다?
그리 분노하신 분이 공산당과 레닌 연관되고 싶어 하는게 말이 되나요 ?
이게 말이 되나요 ??
님이 홍범도라면 가만히 있을까요??
상식적으로 생각보시죠?
홍범도가 뭔가 독립운동 했다, 독립군으로써 그 명예보다 더 이득된걸 받았으니까
혹은 받을 예정이니까
죽을때까지 난리치지 않았겠죠?
그러니까 보고서 쓰고 난리쳤지만 결국에 입을 다물었다는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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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부대는 3연대로 됐는데, 그렇게 따지면 연대를 섞어서 사용했다는 것이 됩니다.
홍범도 부대는 따로 분리됐고, 소속원을 옮긴 적이 없습니다. 홍범도 부대는 440명이 고려혁명군 제3연대로서 따로 존재하고 있었죠. 그리고 홍범도 부대는 홍범도 소속인데, 일단 홍범도 부대원들이 참가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는데 "안 했다는 것도 없잖아."라고 하시는 거면 곤란합니다.
또 홍범도 부대는 자유시 참변 이후 실망해서 떠나버렸는지 수가 줄어들지만 소련군 편입때도 23년에 홍범도가 군복을 벗게 될 때까지 홍범도 아래에 뭉쳐있었습니다.
그리고 홍범도 부대가 고려혁명군에 가담한 것은 6월 초였고, 자유시 참변은 6월 말이었죠. 여러모로 준비도 안 된 상황인데다가 홍범도도 자리에 없고, 이 때 홍범도 부대를 홍범도 없이 지휘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당시 자유시참변 직전에 독립군들의 통합에 문제점이 자신의 기존 장교 외의 다른 장교들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어서 통제가 안 되는 문제점이 골칫거리였습니다. 홍범도 없이 홍범도 부대를 통솔하고, 심지어 부대를 멋대로 쪼개서 활용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면 놀라운 것이 됩니다. 아마 사학계가 발칵 뒤집어지겠죠.
김홍일은 제가 글 쓰면서 착각했네요
김홍일은 안간거 맞습니다
2-1
그리고 님 말대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다는건 맞죠
여러 가지 이유 중에 말이 안통한것도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상대군과 무장 차이 때문에 항복 했을 가능성이 크죠
갑자기 총질해서 선빵 맞으면서 싸우고 있는데
화력 차이에서 일방적으로 밀리니까 항복했다고 보는게 제대로 보는거라고 생각합니다
선빵 맞았는데 내가 이기고 있다면 당연히 항복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려혁명군이 준비된 상태에서 기습해서 상해파가 일방적으로 당한거고 화력 차이로 이길 가능성이 낮으니까 항복해서 이르쿠츠쿠파가 피해가 없던겁니다
2-2
서로 말이 안통하기 때문에 러시아군이 고려혁명군을 직접 통제하는데 제한이 됩니다
따라서 높은 부대장급들만 작전간에 소통을 위해 러시아어든 조선어를 쓸줄 아는 통역가를 데리고 다녔을꺼고
실질적으로 조선독립군(고려혁명군)은 같이 전투하는 조선인이 병력을 직접 통제 했을겁니다
2-3
그리고 고려혁명군 3연대 홍범도부대원 440명 배속 되었지만, 자유시 참변때 고려혁명군은 300명이 참가했기 때문에 홍범도 부대가 아니다?
이런 빈약한 주장이 어디있나요 ??
저도 홍범도 부대가 100% 다 참가했을거라고 생각은 안합니다
고려혁명군 연대가 몇 개인지 모르겟지만 홍범도 부대가 끝이라고 생각하고
1개 연대 440x3연대 하면 1320명인데 대략 1300명이라 잡고 그중에 300명 투입된 겁니다
상식적으로 홍범도가 자리를 비웠기에 고려혁명군에 자유시 참변에 동참 안하는 사람도 있었을꺼고, 어제까지 같은 독립군으로 싸웠던 사람한테 총구 돌리는건데 적극적으로 참가할려고 하는 사람이 이상한거겠죠
그리고 400명 무장 해제해도 다시 무기주고 탄약 불출하는데 1시간도 안걸립니다
무장해제를 근거로 참가 안했다고 말하기에는 주장이 빈약하네요
2-4
그리고 왜 부대를 갈라서 운영하는게 말이 안되죠 ??
봉오동, 청산리에서도 섞여서 같이 싸웠는데
군대 특성상 없으면 없는대로, 필요한 곳에 병력을 주고 받고 막 집어넣고 돌렸을꺼라 생각하는데요 ???
이게 특별한 기술을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하는것도 아니고
밥 먹고 전투만 하던 사람이 단순히 전투 부대가 지휘관이 다르다고 왜 섞여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
홍범도 부대는 정확하게 언제 창설했는지 모르겠지만
봉오동, 청산리때 기준으로 해도 최소 4-5년은 밥 먹고 총만 쏘으면 전장에서 구른 군인들인데 홍범도가 없다고 다른 사람이 부대 지휘를 못한다는게 말이 됩니까?
무슨 독립군들이 아무리 허접했다고 해도
홍범도 부재시 지휘체계통 같은게 없었을까요??
그리고 당연히 평상시에는 통합이 안되죠, 왜 말을 듣나요 ???
자기 부대 지휘관 외에 명령을 안듣는건 평상시, 비전투시 이야기고,
저긴 홍범도의 부재에 조만간 전투하러 가는 급박한 상황인데
홍범도 외에는 다른 지휘관의 말을 안듣는다는 사고는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요??
군대에서 필요하면 옆중대에서 협조 요청해서 타중대 사람 데리고 와서 일하고 하신적 없나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편할꺼 같은데요
혹시 군대 안다녀오셨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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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부대가 참가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고, 홍범도 부대는 440명이지 300명이 아니었으며, 홍범도 부대는 무장해제 받아들이고 합류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때였으며 홍범도와 홍범도 부대를 비롯해서 다른 사람들의 부대도 당시 수라젭카에 없었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정황상 증거조차 없습니다. 홍범도와 홍범도 부대만이 아니라 '다른 독립군 부대'들과 함께 있었다보니 명확한 알리바이가 있기 때문이죠.
당시 홍범도 부대가 440명인 것과 고려혁명군 300명 맞지도 않고, 홍범도 없이 명령 따른다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자유시 참변이라 하지만 실제로 사건은 자유시가 아닌 3킬로 이상 떨어진 소도시인 수라젭카에서 벌어졌죠. 사망자가 적었다는 부분에서 또 자유시참변 도중 29연대 병력 이끌고 있는 깔란다리쉬빌리가 "왜 기관총 사격을 안했냐?"라고 묻자, 말없이 기관총 열쇠 4개를 내놓은 사할린부대원 사례도 있습니다.
홍범도 부대가 학살 참가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님이 보여주신 기사 링크에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정황증거가 있다고 말하는 말조차 찾아도 안 보이는데 링크라도 대주세요. 하다못해 사학게 교수 논문(해외라도 좋습니다)이라도요.
다른 독립군 부대들과 함께 자유시 내부에 있었지 수라젭카에 없었다는 것이 다른 독립군 부대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교차 검증이 되는 것이죠. 또 사할린부대들도 홍범도 부대가 참가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홍범도 부대가 고려혁명군쪽에 무장해제 받아들이고 속하기로 하면서 440명이나 빠져나가서 균형이 무너져서 상해파 세력이 약소세력이 된 것이 자유시참변을 일으킨거라는 견해도 있다보니, 배신자로 여길 수는 있겠죠.
3-1
우선 제가 말한 정황은 자유시 참변 당시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 있던 기록이나 정황 같은걸 말한게 아니라,
그 일 이후에 죽을때까지의 홍범도 행적에 대한 의문점이 생겼고,
홍범도의 행적에 대한 의문점들을 조각 맞추보니까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해가 갔고 그 행적을 정황이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3-2
홍범도 부대가 직접적으로 학살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학살에 참가한 기록 있었다면 이미 기사라든가 교과서, 논문 같은데 들어가서
독립군 학살자라고 교과서에 실려 있었겠죠 ?
말씀 하시는게 대부분이 글이나 문서로 안남아 있으니까
제 말을 인정할수 없다고 말씀하시거잖아요
그죠??
애시당초 글이나 문서로 남아있었으면
지금 저랑 긴 이야기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위에 문서, 글 기록으로 남은게 없다는 이유로 단순히 무시 하는거라면
대한민국 건국 이래 일어났던 4.3, 5.18 등등 지금 정부가 하는 과거사 진상조사 다 부정하는거랑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3-3
그리고 홍범도가 무장해제 했다고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는데 1%도 관련이 없다고는 말 못해도 적어도 제가 볼때는 큰상관이 없었고, 이건 순수한 정치적 세력 다툼으로 인한 싸움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구요
당시 사람들이 권력 싸움인거 몰랐을까요 ???
홍범도가 배신자로 낙인 찍혔다고 생각하는 이유는요
균형이 무너졌기 때문에 라는 이유도 어느정도 이해는 가는데요
그것보단 살아남은 인원들이 중에 같이 독립운동 하면서 봤던 홍범도 부대원들 알아본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홍범도가 독립군 때려잡았다, 배신자로 이야기가 나왔다고 보는게 더 신빙성 있어 보이지 않을까요?
22년 2월에 제출한 보고서건과 1921년 11월에 레닌이 상해파를 편들어서 이르쿠츠크파와 코민테른 극동지부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체포된 상태였던 상해파들을 풀어준 후에 위축됐던 상해파에게 권력을 몰아준 11월 결정서건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정황증거라는 것은 어떤 정황증거인지 출처 제시해주시고요. 해당 기사에도 님의 주장처럼 홍범도 군대가 참전했다 이런 것은 어디에도 없고, 그런 뉘앙스 말하는 사람도 없으며 부대 쪼개지지도 않았고, 참전한 300명 병력은 고려혁명군정의회 소속으로 고려혁명군의 제3연대(홍범도부대)가 아니고 홍범도부대는 다른 독립운동가들(공산주의 성향 아니지만 자유시에 있던) 증언으로 참가하지 않았다고 나옴.
그래서 22년 2월에 공산주의 성향이 아님에도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들도 홍범도랑 같이 모스크바에서 자유시참변 벌인 이르쿠츠크파 비난하는데 동조해줌. 이 때 홍범도랑 함께 이르쿠츠크파가 자신들의 이름 도용해서 자유시 참변 찬성한 거 마냥 왜곡했다고 비난했던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 중 한 명인 최진동은 레닌 만나서 권총을 선물로 받기는 하지만 공산주의 속하지 않고, 자유시 참변건으로 공산주의를 싫어하게 되면서 장남이 공산주의에 빠지니 당장 그만두라고 사상갈등을 겪기도 함.
참고로 최진동은 이후 따로 독립운동 계속하다가 일제에게 귀순해서 자기 관할 한인들 보호를 거래하는데, 일제의 공작 협력에 응하지 않았고 그래서 감시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귀순한 것은 사실이라 친일파로 변절한거 아니냐는 논쟁이 나오기도 함.
홍범도만이 아니라 여러 독립군들도 얽혀있는 문제고, 이들 중에선 공산주의에 적대감, 혐오감까지 느끼는 사람들도 있음. 이 사람들도 홍범도랑 함께 이르쿠츠크파의 자유시 참변을 22년 2월에 공개폭로를 같이 함.
자유시참변 벌어질 때 홍범도와 홍범도 부대랑 같이 있던 사람들로 이렇게 교차검증이 됨.
4-1
레닌의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에게 했던 행동에 대한 견해는 대부분 님 의견이랑 대부분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위에서 레닌이 이르쿠츠크파를 밀어줬다 그 말 때문에 지금 이야기 꺼내시거라면요
제가 말했던 의미는 레닌이 필요할 때 이르쿠츠크파를 처벌하지 않아서 밀어줬다는 의미로
글을 썻던겁니다
저는 레닌은 계파 상관없이 이쪽, 저쪽 균형 유지하면서 자기 필요한 곳에 이용해 먹은거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4-2
위에도 썼지만
홍범도라는 사람의 행적을 보면서 이해 안가는 행동을 보고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니까 말이 되서 정황증거라고 말한거고요
기록 같은게 있으면요
이미 박제되서 님이랑 저랑 다 보고 이미 교과서에도 나올겁니다
기록에 왜 없는지 진짜 몰라서 이야기 하시는 겁니까?
독립운동가를 증거 없이 비하하면 몰려와서 마녀사냥 하니까 못한다고 보는게 맞지 않을까요?
신문, 언론사, 방송사 같은 시민단체, 방통위한테 털리기 때문에 팩트 체크한 내용이 아니면 함부로 방송에 송출 못한다
학교, 대학, 논문 등재 마찬가지로 정말 확실한 아니면 단정지어 말 못한다
다만 이렇게 추정 할수 있다 라고 쓸수는 있어도 독립운동가 같은 언터쳐블 같은 것은 극성단체 때문에 함부로 말 못함
3. 다만 사람들이 이렇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성 글만 유족한테 고소당할수 있다.
이런식으로 하니까
명확한 증거 없이으니까 대부분 추측성 기록으로 끝나는겁니다
애시당초 증거 있으면 이렇게까지 길게 이야기 안했습니다
4-3
최진동 이야기는 지금 주제랑 의미 없다고 생각하니
따로 답변 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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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 대해 제가 할수 있는 최대한 성실하게 다 답변 해드렸으니까
이번엔 제가 질문 할테니
위에 나온 이야기랑 중복된 이야기가 있어도
참고해서 쓰시던 편하신대로 님이 제 의문점에 출처와 근거에 답변해주세요
5-1
1. 참변 후, 홍범도가 들어간지 얼마 안되었는데 실적도 없었고 전투로 인해 전투편제를 다시 짜야되는 상황도 아닌데 갑자기 의문의 승진한 이유
2. 반평생 독립운동 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독립군 학살했다고 오해를 사서 명예에 타격 입고 암살까지 당할뻔 했는데 레닌 만나고 나서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에 대해 죽을때까지 이르쿠츠크파에 대한 항의하거나 처벌 탄원서 등 적극적인 처벌에 대한 요구하지 않은 이유
3.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해서 연관된 피해자들이 여러명 있음에도 레닌과 단독회담 할수 있었던 이유와 단독회담한 이유
4. 1927년 공산당 가입 후, 1930년에 당원증 발급 받았는데 당원증에는 홍범도가 1919년9월부터 1922년10월까지 참전군인으로서 협동농장에 대한 혜택의 수혜대상임을 확인한다고
적혀있는데 봉오동, 청산리는 공산당이랑 관계도 없고, 1923년부터 연해주 지역 지도자로 활동했는데
이건 어떻게 설명할래요 ??
공산당의 기록 착오인가요 ?
아니면 공산당이 홍범도의 봉오동, 청산리 인정해줘서 공산당 당원증 준거가요??
(당시 공산당 당원증은 정말 받기 어려웠던거 아시죠?)
끝으로 위에서도 이야기 했는데
님 말대로 홍범도가 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있었으면 학계에서 연구하고 교과서에 올라 갔을테니까요
다만 홍범도의 당시 의구심이 드는 행동과 그 후에 일어난 일들 보면
충분히 의심가는 상황이고 했을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증거도 없는데 홍범도 까는 이야기하니까 비하한다고 생각 하시는거 같은데
제가 여러번 말했는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큰사건이였던 최순실 사건이나 4.3, 5.18.처럼
모든 일은 의구심으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기록이 남기 힘든 과거사에 대해 증거가 없다고
의구심을 가지고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것에 솔직히 이해가 안갑니다
그리고 홍범도와 자유시 참변에 연관에 대해서는 더 추적해도 더 나올지 안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의구심 드는건 어쩔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증거가 없어서 믿을수 없다?
좋습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의구심이 가질만한 행동을 했으니까 의심하는 겁니다
chrome-extension://efaidnbmnnnibpcajpcglclefindmkaj/https://www.arirang.ru/archive/kore-ilbo/2019/KI.22.02.2019.pdf
이런걸 정치적으로 이용해 처먹으니까
존나 큰문제로 비화되는거 ㅋㅋㅋ
후쿠시마도 마찬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