츄잉~ chuing~
 | 다크모드
 | 로그인유지
안개-기형도
멜트릴리스 | L:74/A:374 | LV241 | Exp.42%
2,032/4,830
| 0-0 | 2019-12-01 00:31:57 | 113 |
[숨덕모드설정] 게시판최상단항상설정가능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 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 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銃身)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개추
|
추천
0
반대 0
신고
    
[숨덕모드설정] 게시판최상단항상설정가능
30일 이상 지난 게시물, 로그인을 하시면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츄잉은 가입시 개인정보를 전혀 받지 않습니다.
즐찾추가 규칙 숨덕설정 글15/댓글2
[시 문학]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 박노해
크리스 | 2019-12-02 [ 149 / 0-0 ]
[시 문학] 들길에 서서 - 신석정
에리리 | 2019-12-02 [ 86 / 0-0 ]
[시 문학] 들국 - 김용택
에리리 | 2019-12-02 [ 192 / 0-0 ]
[시 문학] 동천 - 서정주
에리리 | 2019-12-02 [ 126 / 0-0 ]
[시 문학] 견고(堅固)한 고독 - 김현승
크리스 | 2019-12-01 [ 1114 / 0-0 ]
[시 문학] 겨울의 빛 - 김명인
크리스 | 2019-12-01 [ 300 / 0-0 ]
[시 문학] 겨울밤 - 신경림
크리스 | 2019-12-01 [ 482 / 0-0 ]
[시 문학] 동승 - 하종오
에리리 | 2019-12-01 [ 1004 / 0-0 ]
[시 문학] 오래된 기도-이문재
멜트릴리스 | 2019-12-01 [ 167 / 0-0 ]
[시 문학] 돌팔매 - 신석초
에리리 | 2019-12-01 [ 161 / 0-0 ]
[시 문학] 안개-기형도
멜트릴리스 | 2019-12-01 [ 113 / 0-0 ]
[시 문학] 도다리를 먹으며 - 김광규
에리리 | 2019-12-01 [ 102 / 0-0 ]
[시 문학] 파초 - 이육사
사쿠야 | 2019-12-01 [ 86 / 0-0 ]
[시 문학] 시소의 관계-이재무
멜트릴리스 | 2019-12-01 [ 87 / 0-0 ]
[시 문학] 꽃 - 이육사
사쿠야 | 2019-12-01 [ 166 / 0-0 ]
[시 문학] 야행 - 윤동주
사쿠야 | 2019-12-01 [ 91 / 0-0 ]
[시 문학] 겨울밤 - 박용래
크리스 | 2019-11-30 [ 198 / 0-0 ]
[시 문학] 겨울 밤에 시 쓰기 - 안도현
크리스 | 2019-11-30 [ 429 / 0-0 ]
[시 문학] 겨울 바다 2 - 신경림
크리스 | 2019-11-30 [ 191 / 0-0 ]
[시 문학] 풍장 1-황동규
멜트릴리스 | 2019-11-30 [ 244 / 0-0 ]
      
<<
<
291
292
293
294
295
>
>>
enFree
공지/이벤 | 다크모드 | 건의사항 | 이미지신고
작품건의 | 캐릭건의 | 기타디비 | 게시판신청
PC버전 | 클론신고 | 정지/패널티문의 | HELIX
Copyright CHUING Communications.
All rights reserved. Mail to chuinghelp@gmail.com
개인정보취급방침 | 게시물삭제요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