츄잉~ chuing~
 | 다크모드
 | 로그인유지
또 홍범도 물타기 하는 사람 나오네 ㅋㅋㅋㅋ
유이 | L:48/A:669 | LV170 | Exp.7%
255/3,410
| 2 | 2023-09-04 17:04:34 | 423 |
[숨덕모드설정] 게시판최상단항상설정가능
링크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

 

 

 

국방부가 최근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등 5인의 흉상 이전을 추진하는 것을 두고 정치권에서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주로 홍범도의 소련 공산당 입당 전력이 문제냐 아니냐를 두고 벌어지는 입씨름이다.
 
그러나 홍범도 관련 논란은 단순히 소련 공산당 가입 활동 이력이 아니라 그가 한국 독립군을 사실상 궤멸시킨 '자유시참변'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마찬가지로 육사에 설치됐지만 독립기념관 등으로 이전 방안이 추진되는 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 등 독립군·광복군 흉상과 홍범도가 어깨를 나란히 하기 힘들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28년 가을 홍범도를 만난 적이 있다는 러시아의 한인 작가 정태는 카자흐스탄에서 발행된 '레닌기치(현 고려일보)' 1968년 8월27일자 기사에 홍범도를 '시넬(러시아식 군복)과 야전가방을 벗지 않았던 농부'로 기억했다. 가방 속에는 레닌에게서 선물로 받은 권총이 들어 있었다. 정태는 "이 홍범도는 시넬과 가방을 벗어놓고는 밥도 못 먹는다고 한다"고 회고했다.
 
홍범도는 1920년 일제를 상대로 성과를 올렸다고 평가받는 봉오동전투(6월)·청산리대첩(10월)의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실상 자유시참변과 이후 그의 행적은 독립운동의 공(功)을 상쇄한다는 평가가 따른다.
 
자유시참변은 1921년 6월28일 소련 스보보드니(자유시)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소련이 한국 독립군을 유인해 학살한 사건이다.
 
소련 적군과 고려혁명군 정의회 산하 고려혁명군(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등 통칭)이 적군 편입과 무장해제를 거부하던 고려공산당 상해파(사할린부대) 한인 독립군을 포위해 무차별 학살한 것이다.
 
참변이 일어나기 20여 일 전인 6월2일 440명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자유시에 도착한 홍범도는 소련의 무장해제 요구에 순순히 응했고, 홍범도부대는 이후 고려혁명군 3개 연대병력 중 제3연대로 편성됐다.(<한국 사회주의의 기원> 임경석, 역사비평사, 2014) 홍범도가 참변에서 같은 한국 독립군을 공격한 고려혁명군 편에 섰다는 정황이다.
 
자유시참변 이후 항일 무장 독립군은 시베리아와 만주 벌판 곳곳에서 사살 혹은 체포당하거나 강제노역에 끌려갔다. 대한민국 육군 중장, 외무부 장관을 지낸 김홍일은 자유시참변에서 한국 독립군 700~800명 사망, 부상자 수백 명, 벌목 노동장으로 끌려간 인원이 1000여 명을 넘는다고 기록했다.(<대륙의 분노-노병의 회상기> 김홍일, 문조사, 1972)
 
반면 가해자 측인 고려혁명군 정의회는 사망자 36명, 포로 864명, 불구중상자 15명, 박일리야(상해파)와 탈출한 자 34명, 행방불명 59명 등 기타 합계 1012명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같은 편차에도 참변의 피해가 참혹했다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유시참변 이후 한국 독립군은 사실상 '궤멸'됐다. 1945년 연합국의 승리로 한국이 해방될 때까지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와 같은 무장 독립운동 역사를 쓰지 못한 이유다.
 
반면 홍범도는 참변 이후 휘하 병력 300명을 소련군에 편입시켰고, 그 자신도 소련군 대위로 편입된 뒤 25군단 조선인여단 독립대대 지휘관으로 승진했다.

▲ 1921년 6월28일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던 러시아 스보보드니 체스노코프역 육교 인근에 있는 급수탑. 참변으로 항일 무장독립군의 역사는 사실상 궤멸당했다. 독립군 일부는 무사히 학살 현장을 벗어났으나 1㎞가량 떨어진 제야강을 건너다 빠른 물살에 휩쓸려 숨졌다.ⓒ러시아 스보보드니=이기륭 기자

홍범도가 참변이 발생한 스보보드니의 '급수탑' 현장에서 독립군들을 직접 학살하는 데 가담했는지 여부와 관련해서는 여러 논쟁이 따른다. 하지만 ▲레닌이 그를 치하하며 하사품을 내린 점 ▲그가 자유시참변 생존포로 재판에 참여한 점 ▲그가 소련군 대위로 편입된 점 ▲참변에서 생존한 사할린부대 출신 김창수·김오남이 그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 등은 홍범도가 참변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특히 소련 정부가 홍범도에게 발급한 복지혜택 인증서는 그가 적군 편에서 자유시참변에 가담했다는 정황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준다.
 
고려혁명군 기관지인 '붉은군사'의 1921년 12월24일자 보도에 따르면, 홍범도는 자유시참변 포로 50명을 판결하는 재판에 3명의 한인 재판위원 중 1명으로 참여했다.
 
'붉은군사'는 "1921년 11월27일로 30일까지 4일 동안 고려혁명군법원은 재판위원장 채동순, 위원 홍범도·박승만이 출석해 금년(1921년) 6월28일 자유시병변 범죄자 50명을 판결하였는데, 세 사람은 2개년, 다섯 사람은 1개년 징역에 처하고, 24명은 1개년 집행유예에 처하고, 17명은 방면하야 군대에 보애녀 종사캐…"라고 보도했다.
 
'중대범죄자'로 분류되어 재판을 받기 위해 열차 화물칸에 실려 갔던 한인 의병운동 지도자 중에는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사람도 있었다. 반면 탈출 도중 기차 바퀴에 팔·다리가 잘려 고통 속에 죽어간 이들도 있었다.
 
홍범도는 자유시참변 이듬해인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주최로 열린 극동제민족대회가 끝난 뒤 레닌과 단독면담했다.
 
레닌은 홍범도에게 '혁명정권에 협조해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면서 금화 100루블, 군복 한 벌, 홍범도의 이름이 새겨진 모젤 권총을 하사했다. 레닌과 면담 후 홍범도는 레닌·트로츠키 등 붉은혁명(볼셰비키)의 주역들과 기념사진도 촬영했다.
 
이때 레닌으로부터 하사받은 권총으로 홍범도는 생사고락을 함께했을 독립운동지사 2명을 사살했다. 참변의 생존자이자 사할린부대 출신인 김창수·김오남이 1923년 8월 하바롭스크에서 홍범도에게 참변의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불시에 공격하자 홍범도는 이들을 사살했다. 
 
이로 인해 홍범도는 감옥에 갇혔지만 레닌의 증명서 덕분에 곧 석방됐다.(<[군사대로] 독립군 영웅 홍범도의 인생 최대 오점은 자유시참변>, 뉴시스, 2021년 8월22일자)
 
자유시참변이 벌어지기 전, 소련의 흉계에 따른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러시아행을 포기했던 이들도 있었다. 청산리대첩의 주역 김좌진 장군과 서일 총재, 이범석 장군 등이다.
 
자유시참변으로 인해 '반공주의'가 더욱 철저해진 김좌진은 그러나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당했다. 서일 총재는 자유시에는 가지 않았지만, 참변에서 많은 동지가 목숨을 잃자 이에 책임을 지고 소련과 만주의 경계지대인 밀산에서 자결했다.
 
반면 홍범도는 마지막 순간까지 소련 정부의 복지혜택을 받으며 '소련의 빨치산 대위'로서 소련 정부에 충성했다. 특히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당시 73세의 노령에도 당국을 찾아 전선에 보내 달라고 요청했을 정도였다. 
 
홍범도는 카자흐스탄에서 극장 경비원으로 여생을 보내다 1943년 10월25일 생을 마감했다.

▲ 이 서류는 소련 정부가 홍범도에게 발급한 일종의 복지혜택 인증서다. 인증서는 "1930년 1월13일 소련 인민위원평의회 중앙집행위원회(소련의 최고 의사 결정기구)의 칙령에 의한 것"임을 확인하고 있다. 서류 우측 증명사진 하단부에는 이 서류가 1930년 3월25일부터 적용되는 '前 붉은 군대와 빨치산 및 가족이 수혜를 받을 권리에 관한 인증서 발급절차'라는 법령의 의거, 발급됐음이 기록돼 있다. 즉 서류는 홍범도가 1919년9월부터 1922년10월까지 참전군인으로서 협동농장에 대한 혜택의 수혜대상임을 확인하는 인증서로 해석된다.ⓒ사진은 2019년 2월22일자 고려일보에서 캡처

그러나 이종찬 광복회장은 지난 27일 이종섭 국방부 장관의 퇴진을 요구하며 '홍범도 등 흉상 이전' 추진 방안을 "반역사적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이 회장은 "북한은 김일성을 무장독립투쟁의 최고 수반으로 선전해온 터여서 그보다 위대한 홍범도 장군 유해를 모셔가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의 봉환사업을 방해했다"며 "홍범도 장군을 새삼스럽게 공산주의자로 몰아 흉상을 철거한다면 결과적으로 북한을 이롭게 하는 행동"이라고도 주장했다.
 
그러나 이 회장의 주장과 달리 북한이 정부의 홍범도 유해 봉환을 방해한 것은 유해를 북한 평양에 안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대외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는 2020년 6월23일 문재인정부의 홍범도 유해 봉환 추진에 "유해가 그의 고향인 평양에 안치돼야 한다는 것은 북과 남은 물론 해외의 온 겨레가 한결같이 인정하는 것"이라며 딴지를 걸었다.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은 28일 페이스북에 "육군사관학교는 공산주의 침략과 도발로부터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과정에서 탄생했고 성장했다"며 "6·25전쟁을 빼곤 존재할 수 없는 학교다. 정전 이후 3000여 회 북한의 도발로부터 국가를 지킨 것 또한 포함된다"고 강조했다.
 
신 의원은 "공산주의자라도 항일운동만 했다면 무조건 순국선열로 모시고 육사에 흉상까지 설치해야 하냐"며 "대한민국 정체성을 저버린 광복회장이야말로 판단하실 능력이 없으시면 즉각 사퇴하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 때 훈장을 추서했으니 보수 정부도 홍범도를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도 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지난 27일 "박정희 대통령 이래 김영삼 대통령까지 보수정권 내내 훈장도 추서했다"는 주장을 펼치며 "6·25전쟁을 일으켰던 북한군 출신도 아니고, 그 전쟁에 가담했던 중공군 출신도 아닌데 왜 그런 문제가 이제 와서 논란이 되는가. 참 할 일도 없다"며 국방부의 방침을 공격했다.
 
그러나 홍범도의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결정된 것은 1962년 2월26일이고, 같은 해 3월1일 서울운동장에서 대통령장을 수여한 것은 윤보선 당시 대통령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윤 전 대통령의 사퇴로 대통령직 직무대행을 맡은 것은 1962년 3월24일부터 1963년 12월16일까지였다.
 
문재인정부가 2021년 홍범도의 유해를 봉환하면서 대한민국장을 추가서훈한 것을 두고 논란이 일었을 당시 한 현대사 전공 역사학자는 본지에 "홍범도는 자유시참변 하나만 봐서도 용서받기 힘든 사람"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이 학자는 "1962년 홍범도를 건국훈장 2등급 '대통령장'을 서훈할 때는 홍범도의 자료가 절대적으로 미비했지만, 지금은 그의 실체가 드러났다"며 "홍범도는 일생을 소련 정부에 충성했고, 봉오동전투의 공적은 인정하더라도 대한민국 건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대한민국장'은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위에 링크 달아놓은

팩트체크한 기사 가져왔다

중요한거 색칠했으니까 

시간 없으면 봐라

 

 

 

하 ㅋㅋㅋㅋㅋ

 

자꾸 논점 흐리고 물타기해서 

홍범도는 관련없다 물타기하는데 

 

저거 설명 좀 해줘

 

 

위에 색칠한 글 반박할수 있으면

내가 틀린거 인정하고 글삭함

 

개추
|
추천
2
신고
    
[숨덕모드설정] 게시판최상단항상설정가능
관심없다여 [L:48/A:486] 2023-09-04 18:01:00
홍범도는 자유시참변 이듬해인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주최로 열린 극동제민족대회가 끝난 뒤 레닌과 단독면담했다.

레닌은 홍범도에게 '혁명정권에 협조해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면서 금화 100루블, 군복 한 벌, 홍범도의 이름이 새겨진 모젤 권총을 하사했다. 레닌과 면담 후 홍범도는 레닌·트로츠키 등 붉은혁명(볼셰비키)의 주역들과 기념사진도 촬영했다.

이때 레닌으로부터 하사받은 권총으로 홍범도는 생사고락을 함께했을 독립운동지사 2명을 사살했다. 참변의 생존자이자 사할린부대 출신인 김창수·김오남이 1923년 8월 하바롭스크에서 홍범도에게 참변의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불시에 공격하자 홍범도는 이들을 사살했다.

빨갛게 칠한 거 이 부분 우선 설명해줌

---

이르쿠츠크파가 홍범도를 비롯한 여러 독립군들 명의를 멋대로 도용해서 자신들을 지지했다는 거짓말을 발표하고, 홍범도는 22년 2월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민족대회에 참가해서는 러시아공화국 군사혁명위원회 참모총장과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에다가 "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함. 이 내용이 원동에서의 이르쿠츠크파와 러시아 정책담당자들의 범죄를 밝히기 위함이라고 적음. 보고서에 슈미야츠키, 최고려, 김하석, 오하묵, 김철훈을 "4천년 조선의 역사 안에서 전례 없는 범죄"를 저지른 살인자로 규정하고 이들을 조속한 퇴진을 요구함. 그리고 이르쿠츠크파가 자신들의 명의 도용해서 거짓말 했다고도 폭로.


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서 이르쿠츠크파와 러시아 정책담당자들의 범죄를 밝히기 위해서 보고서 제출한다고 밝히면서 살인자로 규정하며 퇴진 요구함.

이 부분은 어떻게 생각함?
유이 [L:48/A:669] 2023-09-04 18:33:29
@관심없다여
아 명의 도용 당했는데
홍범도는 공산당에서 주는 혜택은 다 받나요?? ㅋㅋㅋㅋㅋ

님은 다른사람이 님 명의 도용해서 독립군 학살하고 명예에 타격 받았는데 그대로 넘어가나요 ??
같이 학살한걸로 취급 받을꺼 같아서 전 혜택 안받을꺼 같은데요 ???

이게 님이 봤을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
님 말대로라면 앞뒤가 안맞는데요 ?

범죄를 밝히기 위해서 싸우시던 분이
갑자기 소련에서 주는 혜택을 받고 군에서 진급을 한다??

군에 진급을 한다는게 아무 이유없이 주나요 ??
설명해보시죠 ??
관심없다여 [L:48/A:486] 2023-09-04 18:41:04
@유이
공산당에 정식가입은 1927년에 했지만, 그 전에도 친공산당이었다고 말했는데요?

그저 두 파벌에 속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했죠.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두 파벌에 속하지 않았다는 건데?

근데 명의 도용은 홍범도가 22년 2월에 공개 폭로한 건입니다. 홍범도만 그런게 아니라 최진동 등도 명의 도용당했다고 함께 주장했고요.

22년 2월, 모스크바로 가서 원동민족대회에 참가해서 다른 독립군들과 함께 이르쿠츠크파의 자유시참변 폭로 + 공개비난 하면서 자신들의 명의를 멋대로 도용해서 자신들이 찬성한 마냥 발표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때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났었죠.

넘어가지 않고 모스크바에서 폭로하는 등, 비유하자면..

상해파:여당 출신 야당 입지 공산당
이르쿠츠크파:야당 출신 여당 입지 공산당
홍범도:파벌 무소속 친공산당

이런 상황입니다.
관심없다여 [L:48/A:486] 2023-09-04 18:41:52
@유이
22년 2월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민족대회에 참가해서는 러시아공화국 군사혁명위원회 참모총장과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에다가 "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 제출.

우선 이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관심없다여 [L:48/A:486] 2023-09-04 19:52:05
@유이
이르쿠츠크파와 러시아 정책담당자들의 범죄를 밝히기 위해서 22년 2월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민족대회에 참가해서는 러시아공화국 군사혁명위원회 참모총장과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에다가 "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한 건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물었는데 답변 좀 부탁드립니다.
관심없다여 [L:48/A:486] 2023-09-04 18:45:48
참변이 일어나기 20여 일 전인 6월2일 440명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자유시에 도착한 홍범도는 소련의 무장해제 요구에 순순히 응했고, 홍범도부대는 이후 고려혁명군 3개 연대병력 중 제3연대로 편성됐다.(<한국 사회주의의 기원> 임경석, 역사비평사, 2014) 홍범도가 참변에서 같은 한국 독립군을 공격한 고려혁명군 편에 섰다는 정황이다.

--

자유시 참변에서 공격한 것은 29연대 병력 1000명과 고려혁명군 300명입니다. 홍범도의 부대원은 440명이고, 이들이 참가했다는 기록은 확인된 것이 없고 저기서도 그러니 정황이라고만 함.

님 주장은 이럼.

[그리고 제 글 똑바로 안읽으신거 같은데
홍범도가 참가한게 아니라 홍범도 부대가 이루쿠츠파에 참전했다는겁니다
제가 위에 글에 직접 죽였다고 말한적 없어요

홍범도 부대가 참전에서 같이 독립운동했던 상해 공산당을 죽였다고 말했고
홍범도 명령 없이 군대가 움직일수 있냐는겁니다.]

홍범도의 부대원들이 참가했다고 하는데 홍범도 부대원들이 존재하지 않았을 자유시 부근의 '수라젭카 마을'에서 벌어진데다가 이 참극은 사실 대대적인 무력충돌도 아니었음. 사할린부대도 적극 저항을 하지 않고 순순히 항복해서 800명이 넘는 포로들이 잡힐 정도였고 29연대나 고려혁명군도 피해는 거의 없었음.

이게 고려혁명군은 고작 300명밖에 참가 안했고 440명으로 이뤄진 홍범도 부대였을 가능성은 없다시피함. 무엇보다 무장해제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였고, 이런 중요한 일에 1900명의 병력 중 신참에 통제도 어려울 홍범도 부대를 끌고 가는 것은 비정상임.

저 기사에서도 홍범도가 고려혁명군 제3연대에 속한 것에 대해서 "같은 독립군을 공격하는 고려혁명군을 편들었다."라는 것이지 홍범도 부대가 공격했다는 것이 아닌데 어디에서 기반한 것임?
유이 [L:48/A:669] 2023-09-04 19:39:19
@관심없다여
자유시 참변에서 공격한 것은 29연대 병력 1000명과 고려혁명군 300명입니다.
갑자기 이게 어디서 나온 기록인거죠 ??


그리고 님이 가져온 800명 포로기록은 공산당 기록 아닙니까 ?

실제로 피해 입은 대한민국 육군 중장, 외무부 장관을 지낸 김홍일은 자유시참변에서 한국 독립군 700~800명 사망, 부상자 수백 명, 벌목 노동장으로 끌려간 인원이 1000여 명을 넘는다고
기록도 있습니다.


어느쪽이 정확한지는 몰라도
분명히 꽤 많은 사람이 피 흘리고 죽은 사람은 있으니까
김홍일이라는 사람이 당시 현장을 보고 나중에 글쓴거겠죠?

그리고 저는 이런 일방적인 학살 같은건 가해자측 자료 보지 않습니다
간토 대학살, 난징 학살보면 가해자는 욕 처먹기때문에 항상 피해자 수 줄이기 마련입니다



또 님 말대로라면
고려 혁명군 300명 밖에 안되는 인원들 중에 홍범도 부대 인원이 한명도 없다고 어떻게 단정 지을수 있죠?
단정짓는 이유가 어디 있나요 ?,
참가자 명단이 있는것도 아니고??


홍범도 부대 병력 100% 자유시 참변에 다 참가해서 학살했다는 의미로 글쓴게 아닙니다
홍범도 부대 병력들중에 많은 인원들이 자유시 참변에 참가했고 실제로 학살 했을것이다
그리고 홍범도는 그것을 묵인했다 겁니다


이렇게 글쓴거고

홍범도 부대 사람들도 사람인데 계파가 다르다고 같이 독립 운동한 사람들을 다 쏴죽일 인간 백정들은 아니라고 보고
홍범도 명령에 반대해서 참가 안했을 사람도 어느정도 있었겠죠

그렇치만 고려혁명군 소속으로 있었으면 일반적으로 총알 날려오는데 옆에서 멍 때리는지는 않구요
분명히 먼저 사격을 했든 대응 사격을 했든 전투 했고 사람들이 죽었는건 팩트입니다


대대적인 무력 충돌이 없는이유는요
기습할 목적으로 무장한 단체가 준비해서 기습했는데 준비도 안한 반대파가 싸우는데
어떻게 싸워서 이깁니까?
그냥 항복한거고, 사람 선별해서 학살 당한겁니다
관심없다여 [L:48/A:486] 2023-09-04 19:54:08
@유이
[김홍일이라는 사람이 당시 현장을 보고 나중에 글쓴거겠죠?]
라고 하셨는데

김홍일은 이범석 등처럼 현장을 보지 않았고, 그 당시 만주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과장된 기록을 남긴 것이죠. 애초 이 사건 자체가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크나큰 분노를 심어줘서 상해파건 이르쿠츠크파건 코민테른이건 다 못 믿을 놈들이라는 인상을 안겨줬으니까요.

-
2시 20분 29연대 병력 1,000명과 고려혁명군정의회에 속한 한인 병사 300명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29연대 사령관 말라호프의 지휘 아래 공격을 시작했다.
-

희생자들은 주로 29연대 병력과 싸움에서 벌어졌고, 그래서 러시아어를 잘 하지 못해서 죽은 것이라는 의견들도 있습니다. 사할린부대가 적극 저항하지 않았다는 것은 학계의 공통기록이고요.(물론 맞사응 했지만 어디까지나 죽기살기는 아니었다는 거)

그리고 홍범도 부대는 3연대로 됐는데, 그렇게 따지면 연대를 섞어서 사용했다는 것이 됩니다.

홍범도 부대는 따로 분리됐고, 소속원을 옮긴 적이 없습니다. 홍범도 부대는 440명이 고려혁명군 제3연대로서 따로 존재하고 있었죠. 그리고 홍범도 부대는 홍범도 소속인데, 일단 홍범도 부대원들이 참가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는데 "안 했다는 것도 없잖아."라고 하시는 거면 곤란합니다.

"이백록 사약 받았다는 기록이 없는데요?"라고 하니 "안 받았다는 기록도 없지 않느냐?"라는 대답과 같은 것입니다. 애초 440명과 300명으로 맞지도 않고, 홍범도 부대원들은 여전히 하나로 뭉쳐서 존재하고 있었는데 따로 분리됐다는 말도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 홍범도 부대는 자유시 참변 이후 실망해서 떠나버렸는지 수가 줄어들지만 소련군 편입때도 23년에 홍범도가 군복을 벗게 될 때까지 홍범도 아래에 뭉쳐있었습니다.

그리고 홍범도 부대가 고려혁명군에 가담한 것은 6월 초였고, 자유시 참변은 6월 말이었죠. 여러모로 준비도 안 된 상황인데다가 홍범도도 자리에 없고, 이 때 홍범도 부대를 홍범도 없이 지휘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당시 자유시참변 직전에 독립군들의 통합에 문제점이 자신의 기존 장교 외의 다른 장교들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어서 통제가 안 되는 문제점이 골칫거리였습니다. 홍범도 없이 홍범도 부대를 통솔하고, 심지어 부대를 멋대로 쪼개서 활용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면 놀라운 것이 됩니다. 아마 사학계가 발칵 뒤집어지겠죠.
관심없다여 [L:48/A:486] 2023-09-04 18:30:14
그리고 상해파가 왜 레닌과 가까운지 설명해드림.

상해파는 이르쿠츠크파와 대비되게 하면서 부르는 것이고, 원래 한인사회당이었음.

한인사회당이 모스크바에 사람들 파견해서 자금을 받아오고 이게 그 유명한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임.

한인사회당이 모스크바에서 40만 루블(400만이란 설도 있고 액수가 설마다 다르지만 일단 큰 돈을 받음)을 받고 돌아오는데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이 러시아 볼셰비키 당에서 파견한 보리스 스미야스키에게 자신들이 유일한 정통적인 당이라 주장했었고, 한인사회당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이르쿠츠크에 들르니 정통성 가진 자신들이 돈 가져야 한다면서 모스크바에서 한인사회당(상해파)에게 준 돈을 강탈함.

이동휘가 이에 모스크바에 사람 보내서 이르쿠츠크파의 행위를 규탄하면서 한인사회당을 '모스크바가 인정한 유일한 조선사회주의 정당'으로 인정받게 함.

레닌과 모스크바가 '공식 인정'한 유일한 정당은 이르쿠츠크파가 아니라 상해파였음.

1920년 7월 19일부터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 참가한 박진순은 이동휘가 파견한 사람인데 레닌의 바로 오른쪽 옆에 앉을 정도였음. 심지어 코민테른 재외전권위원이라는 지위까지 받음.

근데 이후에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생기면서 이쪽에 일을 맡기면서 박진순은 권한이 약해지고 모스크바와 아무 연줄도 없어서 듣보잡 취급이던 이르쿠츠크파가 갑자기 득세. 한인사회당은 고려공산당 상해파가 된 것.

자유시참변으로 이르쿠츠크파가 이걸 덮으려고 하고, 이걸 막으려고 상해파가 싸운 결과 한국위원회가 만들어지고 11월 결정서가 나옴. 이러고도 안 되는지라 4월 결정서가 나오게 되고.

이렇듯 상해파쪽이 레닌과 직접 연결되고, 레닌 바로 옆에 앉을 정도로 원래부터 가까운 쪽이었는데 극동에 파견된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극동 지역에선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권한으로 모스크바에 의존하는 상해파보다 지역의 이르쿠츠크파를 가까이하고 중점에 두면서 내분이 커진 것.

모스크바에서 공식 인정한 당이 상해파쪽임에도...극동비서부는 이거 취소하는 일도 없이 이르쿠츠크파를 갑자기 공식으로 밀어주면서 양쪽이 대치가 되어버리고 홍범도 부대가 무장해제에 응하고 훗날 고려혁명군에 속하기로 하면서 균형이 무너져버림.
유이 [L:48/A:669] 2023-09-04 19:56:00
@관심없다여
자꾸 기록이 없다 근거가 없다고 하는데
위에 이르쿠츠파가 이겨서 안좋은 기록이니까 축소하고 삭제하니까
본인들한테 나쁜 자료가 별로 없는겁니다

역사는 항사 승자가 원하는대로 글 쓰는겁니다
이르쿠츠파가 이겨서 지들이 원하는대로 기록을 남긴거구요


님 말대로라면 증거 없고 단순히 기록만 보고 따지면요
4.3 사건, 5.18. 정부가 말한게 다 맞으니까
다 간첩들이랑 북한군들이 활동한거고 정부는 그거 다 때려 잡은거에요
인정하시죠 ??

지금 5.18 유공자들 그것들 다 사기꾼들인거에요


이렇게는 말 못하시겠죠 ?
지금 평가가 바뀌는거 아시죠 ? 왜 그러죠 ?
그 기록이 없으니까 증거가 없으니까
추가적으로 계속 확인하고 정황상으로 끼워 맞추기로 조사하니까 나오는겁니다


그리고 상해파랑 이루크츠파랑 관계 모르는거 아니고
님이 댓글 달아놓으신거 알고 틀렸다고 말하는게 아닙니다
저도 님이 말한 정치적인 상황으로 계파끼리 싸움나서 죽인것도 알아요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홍범도가 정치적인 목적이든 이념적인 목적이든 간에 특정 계파에 발 담궜고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거나 일어날껄 예상했음에도 알고 방치를 했든 묵인 했다든 간에
직간접적으로 연결 되어있으니까 까는겁니다

홍범도가 직접 학살했다는 직접 증거는 없죠
하지만 정황상 했을 가능성은 존나 흘러 넘칩니다
관심없다여 [L:48/A:486] 2023-09-04 20:27:17
@유이
축소하고 삭제하니까 라는데 생존자들인 사할린부대원들은 수백명이 넘게 살아있습니다. 이들은 풀려났고, 상해파들의 대대적 폭로와 공세도 있었고 이후 주도권이 잠시 상해파에 넘어가기까지 했습니다.

홍범도 부대가 참가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고, 홍범도 부대는 440명이지 300명이 아니었으며, 홍범도 부대는 무장해제 받아들이고 합류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때였으며 홍범도와 홍범도 부대를 비롯해서 다른 사람들의 부대도 당시 수라젭카에 없었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정황상 증거조차 없습니다. 홍범도와 홍범도 부대만이 아니라 '다른 독립군 부대'들과 함께 있었다보니 명확한 알리바이가 있기 때문이죠.

당시 홍범도 부대가 440명인 것과 고려혁명군 300명 맞지도 않고, 홍범도 없이 명령 따른다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자유시 참변이라 하지만 실제로 사건은 자유시가 아닌 3킬로 이상 떨어진 소도시인 수라젭카에서 벌어졌죠. 사망자가 적었다는 부분에서 또 자유시참변 도중 29연대 병력 이끌고 있는 깔란다리쉬빌리가 "왜 기관총 사격을 안했냐?"라고 묻자, 말없이 기관총 열쇠 4개를 내놓은 사할린부대원 사례도 있습니다.

홍범도 부대가 학살 참가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님이 보여주신 기사 링크에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정황증거가 있다고 말하는 말조차 찾아도 안 보이는데 링크라도 대주세요. 하다못해 사학게 교수 논문(해외라도 좋습니다)이라도요.

다른 독립군 부대들과 함께 자유시 내부에 있었지 수라젭카에 없었다는 것이 다른 독립군 부대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교차 검증이 되는 것이죠. 또 사할린부대들도 홍범도 부대가 참가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홍범도 부대가 고려혁명군쪽에 무장해제 받아들이고 속하기로 하면서 440명이나 빠져나가서 균형이 무너져서 상해파 세력이 약소세력이 된 것이 자유시참변을 일으킨거라는 견해도 있다보니, 배신자로 여길 수는 있겠죠.
관심없다여 [L:48/A:486] 2023-09-04 20:26:19
@유이
또 레닌이 발표한 11월 결정서 모르시나요?

이동휘가 직접 레닌 대담하고 레닌이 상해파의 손을 들어주면서 레닌이 공개적으로 이르쿠츠크파를 비판한 것입니다.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이르쿠츠크파를 편파적으로 원조해서 둘의 충돌이 벌어진 거라고 명시했고요.

상해파 즉시 풀어주고 양수 동등하게 연합으로 구성하라고 하면서 이르쿠츠크파가 주도하던 상황을 엿먹이고 상해파가 다시 치고 올라오게 만듭니다.

이르쿠츠크파가 승자라서 안좋은 기록이니 축소하고 삭제했다기엔 바로 상해파가 역습으로 치고 올라왔는데요?

이후 4월 결정서도 3대 미결 문제는 죄다 상해파 손을 들어줬고요.

근데 위의 질문은 답변 안해주시나요?
관심없다여 [L:48/A:486] 2023-09-05 23:12:17
@유이
어제 저녁부터 줄곧 답변이 없으시네요. 22년 2월에 제출한 보고서건과 1921년 11월에 레닌이 상해파를 편들어서 이르쿠츠크파와 코민테른 극동지부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체포된 상태였던 상해파들을 풀어준 후에 위축됐던 상해파에게 권력을 몰아준 11월 결정서건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정황증거라는 것은 어떤 정황증거인지 출처 제시해주시고요. 해당 기사에도 님의 주장처럼 홍범도 군대가 참전했다 이런 것은 어디에도 없고, 그런 뉘앙스 말하는 사람도 없으며 부대 쪼개지지도 않았고, 참전한 300명 병력은 고려혁명군정의회 소속으로 고려혁명군의 제3연대(홍범도부대)가 아니고 홍범도부대는 다른 독립운동가들(공산주의 성향 아니지만 자유시에 있던) 증언으로 참가하지 않았다고 나옴.

그래서 22년 2월에 공산주의 성향이 아님에도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들도 홍범도랑 같이 모스크바에서 자유시참변 벌인 이르쿠츠크파 비난하는데 동조해줌. 이 때 홍범도랑 함께 이르쿠츠크파가 자신들의 이름 도용해서 자유시 참변 찬성한 거 마냥 왜곡했다고 비난했던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 중 한 명인 최진동은 레닌 만나서 권총을 선물로 받기는 하지만 공산주의 속하지 않고, 자유시 참변건으로 공산주의를 싫어하게 되면서 장남이 공산주의에 빠지니 당장 그만두라고 사상갈등을 겪기도 함.

참고로 최진동은 이후 따로 독립운동 계속하다가 일제에게 귀순해서 자기 관할 한인들 보호를 거래하는데, 일제의 공작 협력에 응하지 않았고 그래서 감시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귀순한 것은 사실이라 친일파로 변절한거 아니냐는 논쟁이 나오기도 함.

홍범도만이 아니라 여러 독립군들도 얽혀있는 문제고, 이들 중에선 공산주의에 적대감, 혐오감까지 느끼는 사람들도 있음. 이 사람들도 홍범도랑 함께 이르쿠츠크파의 자유시 참변을 22년 2월에 공개폭로를 같이 함.

자유시참변 벌어질 때 홍범도와 홍범도 부대랑 같이 있던 사람들로 이렇게 교차검증이 됨.
유이 [L:48/A:669] 2023-09-06 15:25:02
@관심없다여
자정쯤에 답변 달아드림
관심없다여 [L:48/A:486] 2023-09-07 01:31:52
@유이
아직인가요?
관심없다여 [L:48/A:486] 2023-09-09 09:22:37
@유이
6일에 자정에 답변 달아주신다더니 9일이 된 지금도 없네요.
30일 이상 지난 게시물, 로그인을 하시면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츄잉은 가입시 개인정보를 전혀 받지 않습니다.
  
즐찾추가 규칙 숨덕설정 글10/댓글1
[잡담] 육사, 30일까지 독립영웅실 철거 강행···“독립군·광복군 지우려”
크림동 | 2023-11-17 [ 59 / 0 ]
[잡담] 육참총장 "홍범도 흉상 이전, 흔들린 육사 정체성 바로잡는 일" [2]
크림동 | 2023-10-23 [ 142 / 0 ]
[잡담] 제가 이준석 지지 안하게 된 결정적 계기 [24]
후부키 | 2023-10-20 [ 767 / 12 ]
[잡담] [단독] 신원식 "독도에 군 병력 배치, 日에 빌미 제공할 우려"
크림동 | 2023-09-26 [ 50 / 0 ]
[잡담] 개각 이후에도 '尹부정평가' 60%…총선 200일 앞둔 여당 고심
크림동 | 2023-09-19 [ 42 / 0 ]
[잡담] 지지층의 이탈..."尹 지지율 5개월만 최저" [6]
크림동 | 2023-09-18 [ 135 / 0 ]
[잡담] [단독] "검토 중"이라더니…'홍범도 흉상' 옮길 트럭까지 준비했던 육사
크림동 | 2023-09-15 [ 48 / 1 ]
[잡담] [단독]독립운동가 후손들, 육사 명예졸업장 반납한다
크림동 | 2023-09-15 [ 148 / 1 ]
[잡담] 에휴... 흉상 결국 철거됐네... [2]
WONDER | 2023-09-12 [ 292 / 1 ]
[잡담] 하루만에 끝난 국공합작 해프닝?···국회서 모택동 흉상 철거
흑설공주 | 2023-09-12 [ 62 / 0 ]
[잡담] [단독] 8년 전 '홍범도함' 결정 이유 보니‥"독립운동사 재조명 기대"
크림동 | 2023-09-11 [ 53 / 0 ]
[잡담] 전두환·김영삼 정부도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피해자” 규정
크림동 | 2023-09-11 [ 56 / 0 ]
[잡담] 문재앙이 만든 홍범도 흉상 또 다른 문제점 [5]
후부키 | 2023-09-10 [ 286 / 3 ]
[잡담] "대전현충원 앞 '홍범도로' 폐지해야"‥하다못해 도로명까지 지우나?
크림동 | 2023-09-08 [ 41 / 0 ]
[잡담] [단독]육사 홍범도 흉상 철거 주도자, 국정교과서 집필 ‘뉴라이트’ 나종남 교수였다
크림동 | 2023-09-06 [ 32 / 0 ]
[잡담] 또 홍범도 물타기 하는 사람 나오네 ㅋㅋㅋㅋ [17]
유이 | 2023-09-04 [ 423 / 2 ]
[잡담] 홍범도는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고, 자유시 참변에 간접적으로 참여한 인간이다 [13]
유이 | 2023-09-04 [ 570 / 6 ]
[잡담] 홍범도 흉상 세운지 몇년 되지도 않았었네? [2]
궁예 | 2023-09-03 [ 85 / 0 ]
[잡담] “공산주의자 홍범도는 오해”라던 국방부, 과거 영상 숨겼다
크림동 | 2023-09-01 [ 49 / 1 ]
[잡담] '홍범도 철거 반대' 65.9% vs. '홍범도 철거해야' 22.1%
크림동 | 2023-09-01 [ 51 / 1 ]
    
이전검색
1
2
계속검색
enFree
공지/이벤 | 다크모드 | 건의사항 | 이미지신고
작품건의 | 캐릭건의 | 기타디비 | 게시판신청
PC버전 | 클론신고 | 정지/패널티문의 | HELIX
Copyright CHUING Communications.
All rights reserved. Mail to chuinghelp@gmail.com
개인정보취급방침 | 게시물삭제요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