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화 : https://m.chuing.net/zboard/zboard.php?id=whigh&page=1&sn1=1&db_sel=&r_type=&num=&divpage=13&best=&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4200
"...우리가 이 꼴이 된지도 벌써 5년이야."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혀버린 박무봉을 대신해 P가 입을 열었다.
"복수하려면 기회는 충분히 있었을텐데, 뭐하다 이제야 온 거지?"
그녀는 강 검사가 여태껏 살아있었으며, 그가 강와신 박사와 동일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녀가 지닌 감정의 대부분을 피곤함이 대체한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와신은 P를 무시하고 박무봉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마치 박무봉 이외의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듯 했다.
"무봉아, 난 너를 용서한 게 아니야. 그저 복수를 미뤘을 뿐이지. 네놈이 그 더러운 손바닥으로 나를 짓누른 직후, 나는 시공을 넘나드는 존재와 차력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나는 가장 끔찍한 복수를 선물하기 위해 네놈의 인생을 샅샅이 들여다보았지. 그러던 중에 나는 인간을 위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발버둥에 흥미가 생겼고, 일단은 네놈의 이야기를 옆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방금 라르센의 폭주로 명확해졌어. 네놈이 이룬 '차력의 상용화'는 인류에겐 오히려 독이었다는 게!! 그럼 더는 미룰 필요가 없지. 자, 이제 복수의 시간이다 무봉아."
"그래? 할 테면 해 봐. 대체 The Six의 이름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 건지..."
박무봉은 당장 강와신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뜯어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갑자기 컨디션이 끔찍히 나빠졌기 때문이다.
몸이 너무 무겁다. 중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하게 느껴진다. 시야는 캄캄해져 날파리의 움직임조차 명확히 쫓을 수 없었다. 다른 감각들도 마찬가지, 주변을 흐르는 공기 분자의 움직임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 강와신 차력 ㅡ 트루먼 쇼
"이 힘으로 네놈의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지만(30화), 역시 이렇게 쓰는 게 더 마음에 드는군."
어떠한 현상이나 물체 등을 '소품'이나 'CG', '설정'으로 취급해 단순한 가짜로 떨어뜨리는 효과로, 경우에 따라 죽음마저 없던 일로 할 수 있는 차력이다.
강 박사는 이 차력으로 박무봉 일행이 지닌 힘을 실제가 아닌 '가상의 설정' 따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제 그들은 100미터를 달리는 데 몇 초씩이나 걸리고, 맨손으로 바위조차 부수지 못하며, 옥상에서 떨어지면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육체레벨 1의 미물에 불과했다.
"걱정하지 마라, 무봉아. 내 복수는 네놈의 하찮은 목숨과는 별 상관 없으니. 일단은 네놈이 온 세상에 흩뿌린 독, '차력'을 먼저 없애야겠다."
"강 검사!!!! 내가 여기 갇혀 있다고 해서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 인류는 진작 우주로 진출했고, 모든 자원이 풍족하다 못해 넘쳐난다!! 질병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했어!! 이게 다 차력 덕분이라고!! 독은 무슨 놈의 독이야?! 고작 몇몇 미숙한 차력사의 일탈을 가지고 헛소리를...!!"
"그 미숙한 일탈 때문에 인류가 몇 번이나 멸망할 뻔했는지 알기는 하나? 이제 인류의 가장 큰 위협은 '개인'이야. 우리가 알던 현실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
"...!!"
박무봉이라고 해서 이 말에 반박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강와신의 말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뭐, 인류멸망은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치고 넘어가더라도, '최선의 시나리오'조차 그리 밝지는 않아. 인류는 이제 하나의 집단을 이룰 이유를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우주 진출 때문에 그러는 거냐? 셀 수도 없이 많은 타우주의 은하제국들을 보고도 그런 걱정이 드나?"
박무봉이 그렇게 항변하자 강와신은 코웃음을 쳤다.
"겨우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과학기술이나 마법은 물체에도 담을 수 있지만, 차력은 달라. 차력은 오직 인간이 직접 사용할 때만 그 진가가 드러나지.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나? 개개인의 힘이 시스템의 힘을 뛰어넘어 버렸다는 말이야. 마치... 주신들처럼."
그 순간 박무봉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지만, 강와신은 무시하고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물론 주신들은 하나의 공동체 의식을 유지할 수 있었지. 숫자가 적으니까!! 만약 주신들이 수십억 명이었다면 진작에 뿔뿔이 흩어졌을 거야. 같이 있어봐야 이득이 되기는 커녕 허구한날 싸우기만 할텐데 뭐하러 붙어다니겠나?
그런데 지금 인류가 그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차력의 비밀이 퍼져나간지 5년밖에 안 됐으니 망정이지, 시간이 좀 더 지나면..."
※ P 차력 ㅡ 마리오네트
※ 박무봉 차력 ㅡ 롱기누스의 손
그 순간 허공에서 네트가 솟아나 강와신의 몸을 꽁꽁 묶어버렸고, 박무봉은 즉시 손바닥으로 그를 짓눌렀다. P와 박무봉은 '트루먼 쇼'가 차력까지 봉인하지는 못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사실 지금도 차력에 영향을 주는 차력은 굉장히 드물었다. 아직도 이 분야에선 '열쇠'만한 것이 없을 정도다. 물론 그것이 강 박사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어리석은..."
시공간의 안팎을 제 집 안방처럼 드나드는 그가 이런 어설픈 기습에 대처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어느새 박무봉 일행의 옆으로 이동한 강와신은 권총을 뽑아들고 무표정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두 발의 총성이 울려퍼진 뒤, 벙커 안에서 멀쩡히 서 있는 인간은 박무봉과 강와신 뿐이었다. P는 이마에 총알이 박힌 채 쓰러져 있었고, 박엑스도 피인지 뭔지 모를 액체를 흘리며 꿈틀거리다가 결국 움직임을 멈췄다.
"우아아아아아아!!!"
그 광경을 본 박무봉은 피를 토하듯이 괴성을 지르며 온 힘을 다해 손바닥을 내리쳤다. 한때 최연소 The Six 소리를 괜히 들은 게 아니라는 듯이, 5년 동안 심신이 엉망이 된 상태였음에도 그 위력은 벙커의 천장을 완전히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천장이 무너졌으니 햇빛이 박무봉을 환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강와신은 또 언제 도망쳤는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안 돼... 이 빛은...!!"
이번엔 벽에 반사된 햇빛 따위가 아니다. 박무봉은 다급히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으나, 이미 그의 두 눈은 직사광선에 완전히 불타버린 뒤였다.
"아... 신이시여..."
박무봉은 짧게 탄식한 뒤 새하얀 소금 석상으로 변해버렸다. 이로써 한때 위대한 야망을 품고 거침없이 나아갔던 그의 삶은 모든 것을 잃은 채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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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와. 이게 얼마 만이야?"
진모리는 여래를 쓰러뜨린 이후 처음으로 지구에 돌아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지구는 겨우 그 절반 만에 아예 다른 행성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진모리는 남극을 뒤덮고 있는 푸른 초원에도, 수십만 km 높이의 초고층 건물에도 별 흥미가 없어보였다. 어차피 육체만 다른 곳에 위치했을 뿐 늘 현세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르센의 폭주 때문에 걱정했을까봐 잠깐 찾아왔어. 내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현세가 멸망할 정도의 일이 생기면 바로 개입할테니 안심해."
"그... 여정과 관련해서 하는 말인데... 아무리 약속이라고는 해도 이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
"맞아. 무한한 제천대성을 도와줘도 여전히 무한한 세상의 무한한 제천대성이 남아 있을 거 아냐. 넌 이제 좀 쉬어도 돼.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
한대위와 유미라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으나, 진모리는 고개를 저으며 탄식하듯 입을 열었다.
"무한한 세상... 그게 바로 문제야, 유미라. 무한한 세상 속에 너랑 비슷한 '유미라'의 바리에이션은 무한히 존재해. 그리고 모든 면에서 너랑 완전히 동일한 유미라 역시 무한히 존재하지.
당연히 미라 너만의 이야기는 아니야. 한대위 너도 마찬가지고, 삼장, 할아버지, 단아한 등 모두에게 해당되지. 절대신들은 예외지만.."
그리고 그 무한한 세상들은 진모리가 마음만 먹으면 흔적도 없이 지우거나 입맛대로 개조할 수 있었다. 물론 진모리가 차마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한대위와 유미라도 슬슬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 시작했다.
"난 그 모든 것을 봐 버렸어. 그럼,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 '현세'에는 대체 무슨 특별한 가치가 있는 거야?"
"...!!"
둘은 그 순간 굉장히 꺼림직한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서 말하고 있는 존재가 과연 그들이 알던 '진모리'가 맞는지 확신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해도 너희가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
진모리는 너무 많은 것을 볼 수 있었고, 보이는 것들에게 무제한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그 탓에 진모리는 무엇에도 이전만큼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여태껏 함께했던 소중한 사람들도, 찢어 죽일 정도로 증오했던 원수도, 다들 실존인물조차 아닌 가상의 NPC나 다름없어 보일 정도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일부러 물리적인 육체를 유지하고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법칙을 따르는 척을 해왔기에 그나마 이 정도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진모리가 어떻게 변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뭐, 너무 걱정하진 마. 이전의 마음을 완전히 잊지 않도록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테니. 내가 너희 말처럼 쉬지 않고 계속 돌아다니는 것도 그 때문이야. 세상은 넓으니까 분명 무슨 방법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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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모리?! 왜 여기에..."
세계정부 청사로 돌아온 박일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셀 수도 없는 은하를 가로지르며 찾아다녔던 진모리가 바로 여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어제 장관님들(한대위, 유미라)을 만나러 찾아오셨습니다."
"그, 그럼 내 고생은 대체..."
집행위원의 말을 듣고 잠시 비틀거리던 박일표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가장 중요한 이야기부터 꺼내려 했다. 그러나 진모리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선수를 쳤다.
"GP 신호의 정체가 궁금한 거지?"
"그래, 뭐 짚이는 건 없어?"
"글쎄... 내 눈에도 확실히 보이지 않아. 이거 심상치 않은데..."
절대집합의 소행은 아니다. 그들의 정보는 이미 진모리의 시야 안에 들어왔으니까. 그렇다면 이 '정체불명의 절대신'은 절대집합은 아니지만 그들처럼 스스로의 정보를 통제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뭔가 보일듯 말듯 한데...'
[666의 눈]은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거기서 끝이라면 아무것도 못 보는 것과 전혀 다를게 없다. 만물의 소용돌이 속에서 '원하는 정보'를 찾아내는 건 결국 사용자의 실력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사용자의 실력과 별개로 뭔가를 반드시 찾아내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사용자와 상호작용하는 존재는 즉시 사용자의 시야에 들어오며, 사용자를 인지하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바로 지금처럼.
"저, 저건..."
진모리는 너무 놀란 나머지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뭔가'가 그의 존재를 인지했고, 그 역시 '뭔가'의 존재를 인지했기 때문이다.
666:진모리는 666:칼리와 눈이 마주쳤다.
다음화에 계속...
같은 이유로 강와신이 차력을 '독'이라고 부르며 없애겠다고 하는 것도 딱히 인류를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고, 박무봉의 인생 전체를 부정할 수 있는 가장 극악무도한 복수라서 그 방법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만일 박무진 네놈이 걸어온 길이 진정으로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밝혀진다면... 윤 검사, 황 검사, 최 검사의 목숨을 앗아가고 내 목숨까지 노린 대가는 그때 반드시 받아가마.'
아주아주 오래 전이지만... 29화 후반부에서 강와신이 했던 이 대사를 보시면 강와신이 왜 이제와서 복수를 시작했는지 이해하시기 좀 더 쉬울 것입니다. 별개로 강와신이 미쳐버린 건 맞습니다.
체셔 고양이도 트루먼 쇼도 강와신의 차력이 맞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래 전이지만... 30화 초반에 강와신이 박무봉을 되살리는 장면에 능력이 여럿이라는 떡밥을 살짝 뿌려놨습니다.
그럼 강와신은 대체 왜 차력이 여러개인가? 이 부분은 앞으로 작중에서 설명될 예정입니다.
강와신의 일러스트들이 비슷하게 나온 것은 그냥 기적입니다. 저도 보고 놀랐습니다. 유료 AI 중에선 디테일까지 설정할 수 있는 것들도 있나본데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