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시흥시 작업실에서 만난 웹툰 ‘노블레스’의 이광수(왼쪽), 손제호 작가가 노블레스의 장면들을 보여주며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둘은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고 싶어 출판만화 대신 웹툰에 도전했다가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한국 웹툰의 작가가 됐다. 시흥=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한국 웹툰 바람 이끄는 ‘노블레스’ 손제호-이광수 작가
▼ “러시아서 온 팬레터, 외계어인가 싶어 당황했죠 하하” ▼
웹툰 작가들은 구글 번역기를 돌린다. 팬레터를 읽기 위해서다.
웹툰 ‘노블레스’의 손제호(37·글), 이광수(33·그림) 작가는 세계 각지 팬들이 보낸 e메일을 일주일에 10∼20통씩 받는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중국어, 타갈로그어(필리핀), 태국어까지 언어도 다양하다. 영어 e메일은 ‘amazing’(놀라운) 같은 익숙한 단어가 읽히지만 러시아어 e메일을 받고선 외계어인 양 당황했단다.
번역기로 돌린 메일에는 “화려한 색채의 그림을 스크롤로 내려 보니 신기하다”, “웹툰이든 책이든 하루빨리 정식으로 번역된 작품을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일부 팬들은 자국어로 쓴 메일을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 한국어로 바꾼 다음 보내기도 한다.
어둠의 만화 시장에서 1위
‘노블레스’로 웹툰 한류를 이끄는 손제호, 이광수 작가를 경기 시흥시 이 작가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작업실 책장에는 일본 망가(만화)를 대표하는 일명 ‘원나블’(만화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의 앞 글자를 딴 말) 만화책이 가득 꽂혀 있었다. 전 세계 만화 1만여 종이 불법 번역돼 올라오는 영어권 불법 만화 공유 사이트 ‘망가폭스’에서 ‘노블레스’는 원나블을 제치고 1위를 달리고 있다. 홈페이지 메인에는 ‘노블레스’ 코너가 따로 마련돼 있을 정도다. 하지만 두 작가는 1위 소식에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출판만화인 ‘원나블’과 매체가 다르니 단순 비교가 어렵습니다. 외국에서 많이 본다고 하지만 불법 번역판이니 마냥 좋아할 수도 없어요.”(이)
“해외에도 웹툰 시장이 열리면 좋겠습니다. 한국 웹툰이 전 세계에서 읽히고 그 큰 시장에서 제대로 경쟁하고 싶습니다.”(손)
‘노블레스’는 세계인에게 익숙한 소재인 뱀파이어 전설에서 착안해 만들었다. 절대강자인 주인공 ‘카디스 에트라마 디 라이제르’(줄여서 ‘라이’라고 부른다·오른쪽 그림)가 820년 만에 오랜 잠에서 깨어나 인간을 위해 뱀파이어, 변종인간 같은 악의 세력과 맞서는 내용을 그렸다. 라이가 고등학교 학생으로 생활하며 현대 문명에 어색해하는 유머코드도 담겨 있다.
전 세계에서 웹툰 한류를 이끌어낸 데는 주인공 라이의 힘이 컸다. 주인공의 매력으로 승부하는 슈퍼히어로 그래픽노블의 성공과 닮아 있다. 라이는 정신지배 능력을 갖고 있지만 힘을 사용할 때마다 수명이 줄어든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팬들도 인터넷에서 라이가 죽어도 노블레스를 계속 볼지를 투표에 부치고 토론까지 벌인다. 남성 팬들은 ‘멋있다’고 환호하고 여성 팬들은 ‘반했다’며 지지를 보낸다. 손 작가는 “라이가 이야기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기에 진짜 살아있는 존재처럼 차를 마시는 자세, 타인을 바라보는 눈빛까지 매력과 분위기를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누구나 매력을 느끼고 감탄할 캐릭터로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라이의 폭발력은 굉장했다. 2009년 3월 76화에서 라이는 친구를 위험에 빠뜨린 적을 무릎 꿇게 하고 “꿇어라.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다”라고 내뱉는다. 이 한마디 대사로 노블레스는 네이버 웹툰 순위 1위로 치솟았다. 곧 “This is the difference between your and my eye-level”로 번역돼 세계로 퍼졌다. 이 작가는 “제호 형이 건네준 원고를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시나리오를 그림으로 그리고선 카타르시스까지 느낄 정도였다”고 했다. 손 작가도 “스토리를 넘기고 웹툰을 업로드하는 마지막까지 그 대사를 매만졌다. 흔한 문장인데 캐릭터의 느낌을 어떻게 살릴까 며칠 고민했다”고 했다.
“내게 없는 재주에 끌렸다”
두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상대의 재주에 이끌려 만났다.
2007년 전북 익산에 살던 이 작가는 경기 고양시에 사는 친한 형을 만나러 왔다가 같은 오피스텔에 사는 손 작가를 우연히 만났다. 당시 손 작가는 2004년 장르소설 ‘비커즈’로 이름을 알린 프로 작가였고, 이 작가는 만화가 데뷔를 꿈꾸는 아마추어였다.
이 작가는 친한 형 집에서 손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소설 속 이야기에 푹 빠져 앉은 자리에서 시리즈를 모두 읽었다. 그는 “만화에서 그림이 전부라고 믿었고 만화를 보면 그림체만 봤다. 형의 소설을 읽고서야 이야기의 매력에 눈을 떴다”고 했다. “머릿속엔 ‘비커즈’를 만화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가진 돈 탈탈 털어 맥주를 사서 형의 방문을 두드렸어요.”
손 작가는 단박에 부탁을 거절했다. 데뷔도 안 한 지망생이 뛰어난 그림 솜씨가 필요한 판타지를 그려낼 수 있을지, 설사 시작한다고 해도 완결할 수 있을지 못 미더웠다. 소설로 나온 이야기를 만화로 옮기면 독자가 궁금해할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이 작가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비커즈’ 등장인물을 올 컬러로 그려 손 작가에게 보냈다. 같은 인물도 여러 모습으로 석 달 동안 꾸준히 그렸다. 손 작가는 “광수의 그림을 보는데 실력이 정말 뛰어났다. 이 친구라면 내가 머릿속으로 펼치는 상상을 그림으로 옮기겠구나란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출판만화 대신 웹툰을 선택했다. 지면의 한계에 묶이지 않고 웹툰에서 마음껏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다. 2007년 12월 ‘노블레스’를 네이버, 다음에 도전만화로 올렸다. 6개월 만에 네이버에서 정식 연재 요청을 받았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안개가 가려 뿌연 길이었습니다.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으니 인생을 건 모험이었죠. 그래도 그때도 일본에 가자, 세계로 가자고 서로 북돋우며 꿈은 크게 가졌습니다.”(손, 이)
누적 조회수 13억
올해 두 사람은 건강 문제로 두 달 이상 연재를 쉬었다. 손 작가는 1월 견갑골 종양 판정을 받았다. 다행히 양성 종양이라 제거 수술만 받았지만 첫 진단에서 악성 종양 가능성이 크다고 나와 마음고생을 했다. 손 작가는 “아내와 어린 딸도 걱정됐지만 노블레스를 끝낼 수 있을지 두려웠다”고 말했다.
3월에는 이 작가가 긴장성 기흉으로 수술을 받았다. 웹툰만 그리느라 건강 관리를 못했다는 그의 가죽 의자 팔걸이는 닳아서 망가져 있었다.
노블레스는 2007년 12월부터 최근까지 324회가 연재되는 동안 누적 조회수가 13억 건을 넘었고 단행본도 약 12만 부가 팔렸다. 이제 느긋해질 만도 한데 반대였다.
“육신은 여기 있지만 정신은 노블레스 세계 속에 살고 있어요. 이제 더 많은 웹툰 작가와 작품으로 경쟁해야 하니 더 치열하게 삽니다.”(손)
“단순한 순위 경쟁은 신경 안 쓸 때가 많아요. 오히려 그림을 그릴 때 자신과의 싸움이 중요합니다. 거기서 이기면 성취감이 더 큽니다.”(이)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http://news.donga.com/3/all/20140606/64068450/1